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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무악(朝鮮舞樂)[1931.06.29.] - 02. 봉래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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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기록 분류무용>전통무용>궁중무용>향악정재>봉래의 
  • 기록 일시1931-06-29
  • 기록 장소비원 희정당(대조전)
  • 소장처국악아카이브실
  • 기록유형동영상
  • 저장매체VHS

내용

○ 조선무악[朝鮮舞樂][1931.06.29.]의 두 번째 프로그램

○ 프로그램 해설
봉래의는 태조의 창업 공덕을 경송해 세종대왕이 친히 지은 춤으로 '용비어천가'가 만들어진 후 창작되었다. 죽간자 2인과 무원 8인의 군무로, 죽간자의 선구호로 무원이 등장하면 '용비어천가'의 해동장, 야인장, 근심장, 주국장, 적조장 등을 부르며 춤을 추다가 죽간자의 후구호로 춤을 마친다. 아름다운 춤 동작보다는 '용비어천가'의 악장을 많이 부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.
세종 이후 성종 때의 <악학궤범>에 춤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을 뿐 궁중연향에 추어진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. 그러나 1901년(광무5년)과 1902년 비원 함녕전에서 공연된 것이 <진찬의궤>, <진연의궤>에 수록되어 있어 봉래의가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. 1930년 공연은 <악학궤범>과 <궁중정재무도홀기>에 비해 춤의 내용, 창사, 악곡 등이 축약되었으나 무동 인원 10명과 배열도, 무도는 변함없이 이어졌다.
1929년 성경린의 노트에 기록된 봉래의 죽간자 선구호는 '염아조종(생각건대 우리 조정의) 덕성공륭(공덕이 융성하매)'이지만 당시 공연에서는 '공념고석(공손히 옛 일을 생각하니) 융흡어억(억만년이 흡족하다)'으로 바꾸어 불렀다. 조선왕조를 의미하는 '염아조종'을 1930년 상황에서 구호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. 후구호의 마지막 귀절이 '만성환심(만백성이 기쁜 마음으로) 영하승평(축하 하나이다)'은 노트의 기록과 공연이 일치한다.
영친왕 환국근친환영회 봉래의는 이수경이 지도했다. 국립국악원에서는 1981년 김천흥의 재현안무로 초연된 후 여러 차례 공연 된 바 있다.

○ 지도/이수경, 출연/이왕직아악부